흘러간 옛 노래 하나를 듣다가도 문득 어떤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고,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뒤적이거나 때로는 그 책의 표지만 봐도 불현듯, 이젠 세월의 한 켠에 묻어버린, 그래서 사뭇 잊고 지내던 아득한 지난 시절의 기억들과 만나 새삼 거기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어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랬습니다.

모든 것이 빛나기만 하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견뎌냈다'는 것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듯싶은 어떤 시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 시간들이 바로 눈앞에 선연히 떠올라 끝없이 이어져갔습니다. [각주:1]

그리고 그 어느 어름에 김정훈의 유고집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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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혹은 이 책에 얽힌 얘기를 다 하자면 몇 날 며칠 밤을 새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시쳇말로 소설을 써도 몇 권은 됨직한 사연이 있어서입니다. 우선, 이 책은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각주:2] 그래서 이 책을 보면 먼저 그 선물 준 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 한켠이 싸아하니 아파옵니다. 아픈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시절의 누구나가 그렇듯이 많이 방황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하 략)  

이 책은 사제 서품을 3개월 앞두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노르 케테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 바로 어제 영면한 김수환 추기경이 있습니다.


김정훈 부제는 -사제품을 불과 몇 달 앞둔 그였는데-오스트리아 인스부루크 어느 산에서 불의의 조난으로 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훈이와 내가 각별한 친분을 맺은 것도 아니다.단지 오스트리아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외국 여행 중에 국내에 있는 신학생들보다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기회가 한두 번 더 있었을 뿐이다.그러나 정훈이는 말이 적으면서 인상을 깊게 남기는 젊은이였다. 그는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었고,언제나 참된 것을 찾는 철학도로 보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한 법이다. 그러기에 그는 남달리 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오스트리아 티롤(Tirol)지방의 눈 덮인 산들, 알프스의 높이 솟은 줄기는 정말 아름답다. 맑은 인품에다가 고독과 사색 속에 진선미를 찾는 사람은 그 수려한 산들과 대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곧 그의 일주기를 맞이하게 된다.우리들 눈 앞에서 그는 갔으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오히려 더욱 깊은 의미로 그는 살아 있다. 비록 김 부제는 사제품을 받지 못했으나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그 산에서 스스로를 깨끗한 제물로 바쳐졌으니 보다 값지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 김수환 추기경 서문 중에서


김정훈이 누구길래 추기경이 직접 서문까지 썼을까?

여전히 까칠한 성격이었는 데다가, 하늘 아래 것들은 모두 눈 알로 보고 살짝 시건방 떨기에 한창이던 내가 저 책을 선물로 건네 받으며 삐딱하게 내뱉은 첫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저 행동은 얼마나 치기어린 행동이었는지요. 그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저런 내 허세는 이내 무너져내리고 말았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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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는 김정훈이 생전에 쓴 일기와 메모들, 그리고 주고받은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즘은 일기도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일기는 한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록입니다. 하물며, 자신이 사고사할 지도 모르는 이가 구도의 길에서 쓴 일기임에랴.

일기에는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왜 이 땅에 사람으로 왔는지, 신앙인으로서 갖는 인간적인 갈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짓들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한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이런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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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법한 내용입니다. 신부행을 택한 이기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 정리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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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을 이어지고 있는 이같은 모습에, 이를 지켜보다 못한 신부가 한마디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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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런 메모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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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책에는 고 김정훈이 직접 그린 여러 장의 수채화가 있습니다. 그림은 고인을 그대로 닮은 듯이 하나같이 수채화 특유의 담백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어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이 책에 서문으로 실은 4쪽 분량의 글 가운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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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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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 이 포스트는 원래 어제 올리기를 예정한 글이었으나, 다른 글이 대신 올라가는 바람에 뒤로 밀렸습니다. 점심 후에 곧 외근을 나가야 하는 터라, 쓰다가 만 글을 그냥 올립니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글이 계속 떠 있는 게 뵈기 싫어서입니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얘기는 오늘 밤에 계속해볼 생각입니다. 인스브르크와 오지리는 개인적으로도 연이 있는 터라 하고픈 말이 꽤나 많은 포스팅입니다.  

<덧2>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베텔불프 산 정상에 올라 눈밭에 남긴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그리고 김 베드로"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1. 나이가 들었다는 명징한 증거일 터다. [본문으로]
  2. 내가 10권 이상을 선물한 책이기도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