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 등 온갖 정치집단은 권력 장악을 위해 불만 바이러스를 무한대로 생산·유포했다. 특히 이들이 질러대는 짜증과 비관적 전망은 온 국민을 투덜이로 만들었다. 한편에선 욕망과 기대를 한껏 부추기고, 다른 한편에선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을 재촉했다. 불만을 항구화하는 시스템이다.

덥다. 지독한 수재 뒤끝이어서인지 불쾌지수는 연일 상한을 친다. 열대야에 잠을 설친 새벽마다, 졸린 눈 비비며 이렇게 소망해 본다. 더위야 어떻게 하겠는가. 아침마다 터무니없이 속 뒤집는 이야기는 말고, 좋은 이야기 좀 들어보자. ‘굿 모닝’ 좀 해보자.


곽병찬 논설위원

한겨레신문 곽병찬 논설위원의 오늘자 칼럼 <‘좋은 아침’의 적들> 마지막 두 단락이다. 버스에서 이 기사를 읽다가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곽병찬 논설위원은 칼럼에서 '행복'을 이야기한다. 이런저런 사족 다 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선진국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굳이 외국의 이상한 연구소나 애들 이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동의해줄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누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아니라고나 할까 싶었는지 마지막에 한마디를 더 한다. "이 모든 게 다 '보수언론' 때문이다"는, 이제는 하도 식상해서 웃기잡지도 않는 궤변을 기어이 집어넣어 초를 치고 있다. 곽병찬 논설위원은


"보수언론 등 온갖 정치집단은 권력 장악을 위해 불만 바이러스를 무한대로 생산·유포했다. 특히 이들이 질러대는 짜증과 비관적 전망은 온 국민을 투덜이로 만들었다"


고 투덜거린다. 참 얼척없는 투덜거림이다. 이 투덜이의 멘탈리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신의 투덜거림은 정당한 비판이지만, 다른 이의 투덜거림은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이 아동티한 멘탈리티는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한겨레신문의 가치는 투덜거림에 있다. 암울했던 시절, 한겨레의 투덜거림은 사람들에게 한줄기 시원함을 안겨주었다. 그런 투덜거림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열린사회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동일한 투덜거림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비판적 논지를 "불만 바이러스"를 생산 유포하는 것으로 본다거나 "짜증과 비관적인 전망"으로 치부하면서 그만 좀 투덜대라고 말하는 곽병찬 한겨레 논설위원. 이 분에게 꼭 해주고싶은 말이 하나 있다. 오지랖 넓게 '보수언론' 따위 남의 언론까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곽병찬 논설위원, 니네 신문이나 제대로 챙기세요.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