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종석 | | |
이런 글이 ‘시론’ 난에 어울린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내가 <시사저널>과 맺은 인연을 돌이켜보고 싶다. 1989년 이 잡지가 가판대에 처음 꽂혔을 때부터 그 창간 구성원 몇 명과 사적 친분이 있기는 했으나, 내가 <시사저널>과 직업적으로 얽히게 된 것은 1996년부터다. 나는 그해 3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두 해 동안 <시사저널> 파리 주재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그즈음 나는 파리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시사저널>에서 일하던 가까운 친구가 다리를 놓아 이 주간지의 ‘식솔’이 되었다. 내가 배곯을까 걱정한 친구의 고마운 배려였다. 정규직은 아니고 계약직이기는 했으나, 나는 이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1997년 3월 프랑스 외무부에서 받은 프레스 카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 나라에서 외국 기자들은 해마다 프레스 카드를 갱신해야 했고, 프레스 카드를 새로 받으려면 그 전 해에 받은 카드를 외무부에 되돌려줘야 했다. 나는 귀국이 1998년 3월로 예정되어 있던 터라 이해에는 프레스 카드를 갱신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1997년치 프레스 카드를 지니고 서울로 왔다. 그 프레스 카드에는, 내 로마자 이름 밑에, 내가 <시사저널> 기자(Correspondant, Sisa Journal)임이 밝혀져 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파리 주재 편집위원’이라는 그럴듯한 직위는 없어졌지만, <시사저널>과의 관계는 그 뒤에도 띄엄띄엄 이어졌다. 나는 한동안 ‘문화비평’ 필자였고, 지난해 봄부터는 한 달에 한 차례씩 이 난을 메우고 있다. 나는 <시사저널>의 이 외부 필자 경력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멀쩡한 감수성을 지닌 저널리즘 종사자라면, <시사저널>과의 인연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사실 한국 시사 주간지의 역사는 <시사저널>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할 만하다. 우선 디자인을 포함한 편집에서, <시사저널>은 그전까지의 시사 주간지들과 또렷이 다른 국제 규범을 선보였다. 이 새로운 시도는 언론계에서 생생한 메아리를 얻었다. 기존 시사 주간지들이 그 뒤 죄다 <시사저널>의 외양을 좇아왔고, 이후 태어난 시사 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사저널>과의 인연에 자부심 느껴
그러나 한국 저널리즘에서 <시사저널>의 진정 중요한 공헌은 그 세련된 겉모양에 있지 않다. <시사저널>은 한국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사 주간지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전까지의 시사 주간지들이 일간지 기사의 ‘슬로 모션’이나 ‘리플레이’나 우수리 창고 노릇을 했다면, <시사저널>은 일간지들이 그 하루 단위 순환의 조바심 때문에 감히 손댈 수 없었던 영역을 새롭게 일궈냈다. 구체적으로, <시사저널>은 심층 분석과 탐사 영역에서 한국 저널리즘을 주도해왔다.
그것은 <시사저널>이 저널리즘의 전문성을 추구하고 성취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창간 무렵부터 지금까지 <시사저널> 기자들은, 이름 앞에 ‘전문기자’라는 말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대개가 전문기자였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일간신문의 여느 기자들보다 자신의 분야를 훨씬 더 깊고 넓게 알고 있었다. <시사저널>의 특종들은 흔히 그런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일간신문들이 <시사저널>을 자주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거기 있다. 게다가 이 잡지는 한국 언론의 고질이라 할 정파성에서도 자유롭다. 말하자면 <시사저널>은 전문성과 공정성을 아울러 갖췄다. <시사저널>의 이런 성취가, ‘오너’가 바뀌는 경영의 어려움을 딛고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매체 구성원들에 경의를 거둘 수 없다.
최근 몇 차례 <시사저널>에서 ‘편집국장의 편지’가 빠졌다. 저간의 사정을 바람결에 듣기는 했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서 시시비비를 가릴 눈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흐릿한 눈에도 또렷이 보였다. 일이 처리되는 방식이 <시사저널>의 기품과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사저널>에서 ‘편집국장의 편지’를 다시 읽고 싶다. 이윤삼 국장의 편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