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한겨레신문, 한겨레21 등을 통틀어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기사는 늘 2%가 부족하다.
당신의 눈엔 이들이 보였던가 - 좁고 쾌쾌한 쉼터에서 고약한 하루하루 보내는 경인선의 투명인간 청소부들… 왜 그들은 일반 노동자들이 너무 평범하게 누리는 걸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한겨레21의 기사다.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수작이다. 그럼에도 뭔가 부족하다.
이 기사는 만들어진(기획) 기사다. 당연히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목적)가 있는 기사다. 이 기사는 과연 그 목표를 제대로 달성했을까? 아니다. 약간의 대중적인 감상 혹은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목적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기사는 한겨레가 그렇게 비판해마지 않는, 전형적인 조선일보식 기사다. 두 가지 점에서 이 기사는 조선일보 기사와 판박이다. 하나는 기사를 만들기 위한 기사라는 점에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기사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에서 조선일보식 기사를 그대로 빼박았다.
그러나 조선일보식 기사로 한겨레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란 불가능하다. 우선 한겨레는 대중적인 전달력에서 조선일보에 미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독자 계층이 두텁지 못하다. 조선일보와 같은 방식으로는 조선일보 기사와 같은 파괴력을 기대할 수 없다.
대중의 감정선을 포착하고, 드러나지 않게 그것을 건드리는 기술(혹은 역량)은 조선일보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한겨레는 이 부분에서 특히 취약하다. 한겨레의 기사는 자주,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하기에 앞서, 기자가 먼저 감정과잉의 상태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기자와 독자의 위치가 전도되는 이 순간, 기사는 이미 그 힘의 절반을 잃었다고 봐도 좋다.
더 나쁜 것은 기자가 자신의 의도를 너무 노골적으로 노출한다는 점이다. 한겨레는 자주 독자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한겨레 독자의 폭은 그렇게 넒지 않다.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대중에로 나아가는 데 써도 부족하기만한 한 힘을 불필요한 데까지 쓰는 것은 낭비일 뿐 아니라 무용한 일이다.
한겨레는 부족하다. 조선일보와 같은 방식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한, 한겨레는 늘 2%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겨레에게 있어 이 2%는 99%의 존재 이유다. 한겨레를 한겨레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2%인 때문이다.
한겨레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다. 자신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그러나 한겨레가 잘 하는 것은 자기 비판이 아니다. 비판의 화살은 늘 외부로만 향해 있다. 모자란 이들이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취하는 전형적인 행동 양식이다.
<덧붙이는 글>
한겨레는 혹시 메이저가 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닐까? 마이너의 이익을 누리며 마이너에 안주하고싶어 하는 것 아닐까? 한겨레의 이같은 심오한 전략을 우매한 내가 미처 깨닫고 있진 못한 건 아닐까? 덥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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