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후배가 있었다. 후배라고 했지만, 한 살 터울로 거의 친구나 진배없는 후배였다. 어릴 때는 한 집에서 살았고, 학교도 줄곧 한 해 터울로 같은 데를 다녔다. 흔히 '불알 친구'라 부르는, 서로에 대해 모를 게 하나 없는 그런 사이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멀어져 있다가 몇 해 전에 이 후배를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그래서 더 가깝게 지냈다. 모든 걸 드러내고 살기 힘든 경쟁 사회에서 모든 걸 다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할말 아니 할말 다 하면서 몇 년 동안을 그렇게 함께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이 으레 그렇듯이, 몇 해 뒤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른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인 끝에 사이가 멀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어느날 내가 적을 두고 있던 회사의 공개게시판에 '아는 사람'의 이름으로 글 하나가 올라왔다.


** 한 넘, 하oo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나는 하oo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oo의 ** 한 정체를 알고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


대략 이같은 내용의 글이었다(여기서 '**'은 아름답지 않은 단어다). 길지도 않은, 내 기억으로는 단 세 줄의 글이었다. 하지만 그 게시물이 내게 입힌 상처는 '깊고 컸다'.

게시물의 아이피를 확인한 결과 그 후배의 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외마디가 절로 나왔다. '배신감'이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다. 무엇보다 창피했고,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치한 감정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조회수는 이미 천문학적인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비난섞인 리플이 달리기 시작했고, 비난의 강도와 리플의 빈도가 걷잡을 수 없이 높고 빨라져갔다. 대책이 없었다.  내용이 사실인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게시판에 '잘 아는 사람'의 비난 글이 떴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당시 나는 이른바 '열린 사회의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적이 '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방이 적(?)인 상황이었다. "니 배때지에는 사시미칼 안 들어가나 보자"면서 오밤중에 회사 현관까지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 게시물은 한순간에 나를 '그들의 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부적으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우군'이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삐딱한 시선'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식의 눈길이 줄곧 주변을 감싸고 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잘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장차는 우군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일이겠기에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고 해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였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과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는 것. 그러나 대응을 하지 않는 경우 '아무말 안 하는 거 보니 뭔가 구린 구석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 식의 반응이 뒤따를 게 뻔했고, 그게 아니다며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봤자 구구한 억측으로 말이 또다른 말을 낳거나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는 식으로 비약될 게 뻔했다.

어떤 경우라도 이제 사건 이전의 상태로 나를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영락없이 "**한 넘"이 되어 견딜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 폭로의 주체가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그것을 깨는 것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일종의 굴레였다.

'아는 사람'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이 그 상대의 백마디 말을 무력화하고도 남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그때 처음 절실하게 느꼈다.

이 사건은 다행히(?) 그 한번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일은 상당 기간 나로 하여금 "세상을 헛살았다"고 하는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그것은 내게 어떻게도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남겼고,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앞선 글의 댓글에서 어떤 분이 "당사자도 아니면서 뭘 그리 이상하게 격한 감정을 보이느냐"고 했다.

뜨끔했다. '아닌 척' '객관적인 척' 글을 쓰고 있었지만 확실히 나는 이상하다싶을 정도의 격한 반응을 내비치고 있었다. 글이 초점을 잃고 버벅거린 것도 실은 이같은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한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치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위의 '하드윤미' 김 기자가 쓴 기사를 읽으면서, 그리고 기어이 그 원본 사진을 구해보면서 든 생각은 "아는 넘이 더 무섭다"는 사실의 재확인이다.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와 내 주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더 정확히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폭로되는 진실이 아닌 사실, 혹은 특정한 사건에 맞춰서 내 주변 사정에 밝은 이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인신공격성 폭로이다.

'아는 사람'에 의한 폭로가 갖는 가장 큰 위험성은 그 폭로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있다. 이같은 폭로에는 누구라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입게 되는 데미지 상처는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크다.


"인간은 얼마나 야비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말이다.

바로 내 얘기다. 결국 나는 내 경험치를 벗어나지 못한 내 얘기를 하면서 애써 객관적인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노현정을 변호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X파일 건을 들어 어줍잖게도 내 변명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씁쓸하다. 그리고 참 덥다. <통신보안>



<덧붙이는 글>
나는 기본적으로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신공격성 폭로'에 반대한다. 동시에 이같은 폭로에 부화뇌동하여 그 대상을 물어뜯고 무자비한 악플을 날리는 행위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야비하고 저열한 행동 양식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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