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고 음모론이다 뭐다 하는 아해들.. 참말로 안습이다. 대한민국 네티즌들.. 진짜 왜 이러냐? 이건 갈수록 허접 모드니.. -_ ;;
과도기적 현상이다 하고 넘어가자면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겠으나 그래도 씁쓸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 한다.
"아주 쑈를 하세요~ 쑈~!!"
<덧붙이는글> 동영상 만든 님.. 정말 큰 일을 하셨습니다. 궁금해하던 부분들을 선장의 입을 빌어 직접적으로 아주 잘 전해주고 있네요. 다만, 포스트의 타이틀 설정은 대단히 잘못되어 있는 것같군요. '조작'이니 '고의'니 하는 말들이 동영상의 내용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에 하는 얘기입니다. 잘 봤습니다.
<덧붙이는 글2>
이 글 때문에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는데.. 너무 짧은 글이라 뭔가 허전해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같군요. 서비스 차원에서 글 하나를 덧붙입니다.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근처에서 살던(?) 시절의 얘기인데.. 굉장히 긴 글 가운데 일부입니다. 피씨통신 시절 올린 글이어서 약간 후집니다. 혹시 시간 남는 분들 있으면.. 그냥 재미삼아 읽어주시길.. ^^
요컨대, 나는 뱃넘이었다(어부, 뱃사람.. 이런 말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뱃넘 - 이게 딱이다). 저 남녘이 고향이던 내가 교복을 입은 채로 무작정 상경(여기서 '상경'이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때의 기착지는 서울역이 아니라 인천항이었으니까)하여 첫 외지 생활을 시작한 곳이 태안 반도였다.
그때가 19**년이었는데 나는 그 후 대략 1년 반 정도를 그곳에서 지냈다. 나는 만리포와 연포 사이의 한 작은 포구에서 멸치 잡이 배와 거잇(게잡이)배와 삼치 잡이 배를 탔으며 때로는 서산이나 대천 등지에서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나는 그곳에 대한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서해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그 숱한 섬들과 그 섬들 사이를 하염없이 누비는 고기잡이 배를 기억하고, 아침 서해 바다의 해돋이와 그 한낮의 찌는듯한 고요와 북새가 뜬 저녁 하늘과 고기 떼가 일으키던 수평선 위의 자욱한 은빛 물보라들과 그 온 바다를 에워 날던 수많은 갈매기들을 기억하고 있다.
느닷없는 바람으로 회항을 하던 어느 폭풍우 치던 날의 무서운 파도들을 기억하고 있고, 포구 앞 대섬을 한 너울에 집어 삼키고 달려 오던 그 여름 날의 어마어마하던 해일과 어금니를 사려 물어도 어찌할 수 없던 저 겨울 바다의 가슴 에이는 추위를, 그리고 짙게 끼었던 해우장(바다안개)과 그 막막했던 어두움을, 길을 잃은 뱃전에 쏘아대던 해병 기지에서의 저 무차별한 사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봄날의 언덕 배기 밭들과 그 겨울의 빈 들판을, 그리고 온 천지가 백설로 뒤덮였던 어느 날 밤의 그 평화하던 세상을, 그곳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이야기를.
하모니카 하나로 말이 없던 소죽은 귀신 안 서방과 꿩 사냥 당근 서리에 귀신이던 감나뭇집 머슴 김 막동이를 기억하며, 씨름 대회 때마다 등 떠밀려 나가서는 늘 이등만 하고 돌아오던 키다리 장총각과 김참봉네집 댕기머리의 하교 길목을 저녁만 되면 지켜 보던 우리 집 숙맥 김가와 주색 잡기라면 모르는 것이 없던 그 김참봉네 일꾼 차성기와 그리고 건넌 마을 대밭에서 처자 하나 건드리고 돌아와 자랑하는 날 밤에 덜컥하니 수갑차고 붙잡혀가던 논다니 이기수와 그지없는 일꾼이지만 술만 먹으면 건드릴 사람이 없던 개빙장이 이일만과 우악스럽게 일을 하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울어쌓던 홀애비 문씨를, 또한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우리 집 승철이를, 망나니 짓만 하고 다니던 종합 농고의 한석규를, 그리고 그가 쫓아 다니던 감나뭇집의 여학생 김혜숙이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또 기억하고 있다. 30년 어부 생활에 술밖에 남은 것이 없다던 그 마음씨 좋은 늙은 어부 심씨와 무슨 일인가로 쫓기고 있던 어두운 눈빛의 청년 김군을, 줄창으로 싸워 대던 언덕 배기 집의 털보 강씨와 어느날엔가 퉁퉁 부은 시체가 되어 떠올랐던 그의 억척같은 아내를, 회칼을 양손에 들고는 부두를 질주하던 거잇배의 떠돌이 장발 청년과 웃통 벗어 제치고 문신 투성이의 온몸에 칼자욱을 그어대던 차부의 노랑 머리 차문배와 그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화사하기만한 모습이던 대천 하우스의 미쓰 민을, 또한 화투방에만 앉으면 날새는 줄 모르던 우리 태양호 선장과 말끝마다 기름밥 20년을 들먹이던 우리 배 기관장과 노상 의리 빼면 시체라던 우리 배의 갑판장을.
아아.. 그리고 나는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항상 헤설프게 웃어대던 열 여섯 살의 그 아이 *님이를, 그리고 그 아이를 벼르고 있던 어판장의 저 날나리 병태 형을, 노래 자랑이 열렸던 한가위 날과 그 이후로 나날이 사위어 가던 그 아이의 웃음을, 그리고,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차부로 향하던 그 아이의 늘어진 어깨와 그 마지막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이 모든 것들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거니와 그러나..
여기다 그 얘기들을 다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겠다. 다만 그곳이 내 젊은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지금도 남아 있음은(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