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상품의 성패는 작명에 달렸다는 혹은 소설이란 모름지기 제목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소설이다.
내가 아내에게서 받은 2만원의 꽉 짜인 돈으로 영풍문고의 서고를, 살펴가시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돌고 돌면서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끝에, 비록 몇 장을 뒤적여 보아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면서도, 결국 계산대로까지 이 책을 가져가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가. 기대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건만 실망스러웠고 한번 인쇄하는데 몇 부씩을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반 년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초판 6쇄를 찍었다는 소문에 비하면 그것은 내게 짜장 먹을 것 없는 잔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막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더구나 그는 4부에 계시는, 그것도 적당히는 용납치 않는다는, 저 무섭게 까버리는 한겨레신문의 기자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쯤에서 미리 다시 한번 이것이 나의 철저한 사견임을 밝혀 두고자한다. 쿨럭~
애니웨이(이것은 김한길의 어투에서 빌어 쓴 것인데 꽤 편리하다). 이 소설집은 읽기가 영 어렵다. 뭔가 많은 얘기를 하고 있는 듯싶은데 도무지 황당하다. 처음 몇 편의 소설을 읽다가 아무래도 안되겠기에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해 마지않는 독서법을 택했다. 뒤에 붙은 작가론을 슬그머니 엿보기로 한 것이다. 스킴을 맞추기 위해.
나의 통상적인 독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도저히 어떤 작품에 함께 하기가 어려운 경우 대개 책의 앞뒤에 붙어 있기 마련인 작가론이나 작품해설을 쓱 한번 훑어보고 나면 그 이해의 정도가 현저히 수월해진다. 결국 한껏 열려 있는 내가 가진 생각의 지평을 작가의 그것에다 모둠으로써 보다 손쉬운 이해를 도모해보고자 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겠듯이, 이같은 독법의 해악이란 실로 말해 무삼할 정도로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악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리 한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저명한 평론가인 김윤식 선생이 그 작가론이란 것을 쓰고 있어서였다.
헌데 웬걸, 작품을 읽기 위한 도우미를 구하는 것이 작가론을 읽은 나의 의도였는데, 이건 황당하기가 저 소설들보다 더한 것이 아닌가. 내게는 김윤식 선생의 말조차가 도무지 요령부득이었다.
사실 김윤식 선생은 한 술을 더 뜬다. 그가 하는 어느 한마디만 가지고도 하루를 온전히 논쟁하고도 남을 여지가 있는 서양 정신사의 몇 가닥을 마음대로 절단 내어 요리하며 희황한 어려움을 더해 놓고 있다.
그러니 이제 예서 나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소설가의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당연히 소설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 또한 피하기로 한다. 이렇게 나의 오독을 인정한 채로,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다른 얘기를 잠깐 해보도록 한다.
나는 소설의 본령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쉽게 말해도 충분한 것을 부러 어렵게 말하는 데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자는 실상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래도 좋은 것을 어렵게 말하고 있다(혹은 그런 듯이 보인다). 마치 독자가 그 디위(경계)를 넘볼 수 없다는 듯이, 쉽게 말하면 자신의 얘기가 가치 없어나 진다는 듯이, 쉬운 말로는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는 심오함을 담고 있기나 하다는 듯이... 된퉁 그런 것은 하나도 담아내고 있지 못하면서. -_
아직 익지도 않은 풋내기 글발에다 소위 민중언어란 걸로 멋을 부린 양이라니.. 그 용기가 행여 만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를 갖게 한다. 사실 그 싱퉁생퉁한 언어의 남용이 오히려 소설을 더한 어색함으로 치장하고 있음을 작가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리 좋은 말도 그것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되려 역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어늘.
작자는 하고 싶은 많은 얘기가 있는 듯 싶다. 그리고 그는 이런 얘기들을 형상화시키는데 있어 아마도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었나싶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은 거의가 단편이다. 단편 하나에서 너무 많은 걸 얘기하려 하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늘 그렇듯이, 내가 저 오묘한, 숨겨진 의미를 챙기지 못한 것이었을른지도.
어쨌거나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밥맛이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말하기도 사실 겁난다.
'21세기 작가총서 간행위원회'라는 저 묵직한 네임 밸류가 그 선언서에서 기념해 마지않는 작가를 일개 소시민이 어찌 다 헤아려 이해한다 할 수 있을 것이며, 더욱이 저들이 선언서에서 배척해 마땅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 바, '미쳐 날뛰는' 소설의 '재미'만을 내가 구하려 하는 데서 이런 몰이해라는 사단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르는 터여서다.
물론 저들이 간행사에서 배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저 삼류만화 스토리 같은 소설들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미쳐 날뛰는' 것으로 단정하고 괄호로 묶어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양에는 솔직히 거시기한 느낌이 앞선다. 이 세상의 모든 소설들이 다 노벨 문학상 뺨쳐야 할 정도의 문학성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어디 있겠나싶어서다.
무엇보다 대상이 되는 소설을 특칭하지 않은 채, 하나같이 싸잡아 괄호 밖으로 밀어내는 행태가 어쩌면 상당히 폭력적으로 보여서고(이들 입장에서는 당근 소설적 재미만을 구해 미쳐 날뛰는 소설이 더 폭력적이겠지만), 그런 작품이 있다면 하나하나 들춰내어 거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게 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테면, 이제 막 소설 읽기에 입문하는 어떤 소설 문외한이 있다고 할 때, 만일 그가 저 선언을 먼저 접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21세기 작가총서 간행위원회가 간행치 않은 모든 소설들은 '심상치'가 않고, '악취 풍기는 권력에 아첨하고 편승하며 진실을 쾌락으로 마취시키는 허구'로 받아들일 여지가 없지 않아서다. 나아가, 그렇다면 이 또한 저 선언이 그렇게 경멸해 마지않는 다른 또 하나의 상업주의적 발호일 수 있다 할 것이다.
저들은 조소하며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우리의 저 선언이 독자들을 그런 방향으로 호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도대체 그렇게 단순무쌍한 독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스스로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독자들을 단순무씩한 바보들로 보고 있는 건 바로 저 선언서를 쓰고 있는 이들인 때문이다. 그들만이 홀로 깨어 현실을 올바로 직시코 있노라 외쳐대고 있는 때문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형식논리 속에다 우리를 묶어 놓지 말라고, 우리는 그런 형식논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양이라면 우리는 이제 소설이 아닌 다른 장에서 우리의 논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아내에게서 받은 2만원의 꽉 짜인 돈으로 영풍문고의 서고를, 살펴가시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돌고 돌면서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끝에, 비록 몇 장을 뒤적여 보아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면서도, 결국 계산대로까지 이 책을 가져가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가. 기대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건만 실망스러웠고 한번 인쇄하는데 몇 부씩을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반 년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초판 6쇄를 찍었다는 소문에 비하면 그것은 내게 짜장 먹을 것 없는 잔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막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더구나 그는 4부에 계시는, 그것도 적당히는 용납치 않는다는, 저 무섭게 까버리는 한겨레신문의 기자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쯤에서 미리 다시 한번 이것이 나의 철저한 사견임을 밝혀 두고자한다. 쿨럭~
애니웨이(이것은 김한길의 어투에서 빌어 쓴 것인데 꽤 편리하다). 이 소설집은 읽기가 영 어렵다. 뭔가 많은 얘기를 하고 있는 듯싶은데 도무지 황당하다. 처음 몇 편의 소설을 읽다가 아무래도 안되겠기에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해 마지않는 독서법을 택했다. 뒤에 붙은 작가론을 슬그머니 엿보기로 한 것이다. 스킴을 맞추기 위해.
나의 통상적인 독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도저히 어떤 작품에 함께 하기가 어려운 경우 대개 책의 앞뒤에 붙어 있기 마련인 작가론이나 작품해설을 쓱 한번 훑어보고 나면 그 이해의 정도가 현저히 수월해진다. 결국 한껏 열려 있는 내가 가진 생각의 지평을 작가의 그것에다 모둠으로써 보다 손쉬운 이해를 도모해보고자 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겠듯이, 이같은 독법의 해악이란 실로 말해 무삼할 정도로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악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리 한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저명한 평론가인 김윤식 선생이 그 작가론이란 것을 쓰고 있어서였다.
헌데 웬걸, 작품을 읽기 위한 도우미를 구하는 것이 작가론을 읽은 나의 의도였는데, 이건 황당하기가 저 소설들보다 더한 것이 아닌가. 내게는 김윤식 선생의 말조차가 도무지 요령부득이었다.
사실 김윤식 선생은 한 술을 더 뜬다. 그가 하는 어느 한마디만 가지고도 하루를 온전히 논쟁하고도 남을 여지가 있는 서양 정신사의 몇 가닥을 마음대로 절단 내어 요리하며 희황한 어려움을 더해 놓고 있다.
그러니 이제 예서 나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소설가의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당연히 소설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 또한 피하기로 한다. 이렇게 나의 오독을 인정한 채로,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다른 얘기를 잠깐 해보도록 한다.
나는 소설의 본령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쉽게 말해도 충분한 것을 부러 어렵게 말하는 데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자는 실상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래도 좋은 것을 어렵게 말하고 있다(혹은 그런 듯이 보인다). 마치 독자가 그 디위(경계)를 넘볼 수 없다는 듯이, 쉽게 말하면 자신의 얘기가 가치 없어나 진다는 듯이, 쉬운 말로는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는 심오함을 담고 있기나 하다는 듯이... 된퉁 그런 것은 하나도 담아내고 있지 못하면서. -_
아직 익지도 않은 풋내기 글발에다 소위 민중언어란 걸로 멋을 부린 양이라니.. 그 용기가 행여 만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를 갖게 한다. 사실 그 싱퉁생퉁한 언어의 남용이 오히려 소설을 더한 어색함으로 치장하고 있음을 작가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리 좋은 말도 그것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되려 역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어늘.
작자는 하고 싶은 많은 얘기가 있는 듯 싶다. 그리고 그는 이런 얘기들을 형상화시키는데 있어 아마도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었나싶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은 거의가 단편이다. 단편 하나에서 너무 많은 걸 얘기하려 하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늘 그렇듯이, 내가 저 오묘한, 숨겨진 의미를 챙기지 못한 것이었을른지도.
어쨌거나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밥맛이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말하기도 사실 겁난다.
'21세기 작가총서 간행위원회'라는 저 묵직한 네임 밸류가 그 선언서에서 기념해 마지않는 작가를 일개 소시민이 어찌 다 헤아려 이해한다 할 수 있을 것이며, 더욱이 저들이 선언서에서 배척해 마땅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 바, '미쳐 날뛰는' 소설의 '재미'만을 내가 구하려 하는 데서 이런 몰이해라는 사단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르는 터여서다.
물론 저들이 간행사에서 배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저 삼류만화 스토리 같은 소설들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미쳐 날뛰는' 것으로 단정하고 괄호로 묶어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양에는 솔직히 거시기한 느낌이 앞선다. 이 세상의 모든 소설들이 다 노벨 문학상 뺨쳐야 할 정도의 문학성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어디 있겠나싶어서다.
무엇보다 대상이 되는 소설을 특칭하지 않은 채, 하나같이 싸잡아 괄호 밖으로 밀어내는 행태가 어쩌면 상당히 폭력적으로 보여서고(이들 입장에서는 당근 소설적 재미만을 구해 미쳐 날뛰는 소설이 더 폭력적이겠지만), 그런 작품이 있다면 하나하나 들춰내어 거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게 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테면, 이제 막 소설 읽기에 입문하는 어떤 소설 문외한이 있다고 할 때, 만일 그가 저 선언을 먼저 접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21세기 작가총서 간행위원회가 간행치 않은 모든 소설들은 '심상치'가 않고, '악취 풍기는 권력에 아첨하고 편승하며 진실을 쾌락으로 마취시키는 허구'로 받아들일 여지가 없지 않아서다. 나아가, 그렇다면 이 또한 저 선언이 그렇게 경멸해 마지않는 다른 또 하나의 상업주의적 발호일 수 있다 할 것이다.
저들은 조소하며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우리의 저 선언이 독자들을 그런 방향으로 호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도대체 그렇게 단순무쌍한 독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스스로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독자들을 단순무씩한 바보들로 보고 있는 건 바로 저 선언서를 쓰고 있는 이들인 때문이다. 그들만이 홀로 깨어 현실을 올바로 직시코 있노라 외쳐대고 있는 때문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형식논리 속에다 우리를 묶어 놓지 말라고, 우리는 그런 형식논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양이라면 우리는 이제 소설이 아닌 다른 장에서 우리의 논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이 글은 이 책을 처음 읽고 나서 노트에다 끄적거려 두었던 것인데.. 이후 작가가 고인이 된 터라.. 한 켠으로 제쳐두었다가.. 10년 전 쯤에 개인 홈피 게시판에 올렸던 것을, 곧 개인 홈피를 닫아야 하는 탓에 오늘 블로그에 옮겨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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