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의 쫄병시대

김신의 <쫄병시대>

김신의 <쫄병시대> -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저 '솔직한 이야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인공 표현일을 통해 작가가 발가벗겨놓고 있는 저 쫄병들의 행태는, '그가 사회에서 어느집 자식이었든지 얼마나 교육을 받았건 간에 턱없이 졸렬해지고 유치해지고 야비해지기까지 하는', 그리고 비굴해지기까지 하는 저 행태는 바로 <쫄병시대>를 경험한 우리 모두의 비애로써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한다.

굳이 작가가 변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신병시절 이한길 소령의 뒤를 쫓아가 용무없는 용무로 다짐했던 충성을, 그리고 신병교육대 교관이었으며 사단장 전속부관인 장교 조일훈 중위에 대한 까닭모를 비하를, 그리고 사회깡패 모춘배와 배건수, 한경열에 대한 저 단순무쌍한 성원을, 여섯 살 소영이에 대한 저 애틋한 감정을 우리는 이해한다.

분명 일탈된 것에 다름아닌 저 표현일의 행위들을 우리는 이해한다. 저 충성이 다름아닌 아부의 한 표상이었으며, 장교에 대한 저 턱없는 비웃음이 자신의 치열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저 성원이 또다른 형태의 비굴에 다름아니었으며 저 애틋한 사랑(?)의 감정 역시 인정받고 싶어하는 쫄병들의 굴절된 감정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은 채 깨어나지 못했고('나는 충분히 깨어 있었다' 말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이하는 고교를 갓 졸업하고 군대에 가야 했던 '우리'로 읽어주시길) 그러기에 지금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쓰디 쓴 자조의 웃음을 짓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해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가 있노라고,

우리는 그같은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 비로소 성찰의 한 계기를,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절절한 체험으로 인해 가지게 되었노라고 우리는 자위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의 훌륭한 설교보다도, 어떤 책의 가르침보다도 더한 절실함으로 가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문득, 어느날 문득, 젊은 날의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병영생활을 했는지를 더한 소리로 읊으면서 우리는 기실 우리의 저러한 과거를 애써 잊으려 하거니와 바로 이 소설은 그러한 허장성세를 그대로 담고 있고 거기에 바로 이 소설의 강점이 있겠더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의 뒤에 붙어있는 김태현의 말은 무시해도 좋았다.

'분단조국의 실상에 대한 좀더 깊은 안목'을 이 소설이 보여 주지 않아도 좋고,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저 악독한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라는 것까지를 생각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이나 암시를 하지 않는 것'이 김태현과 같이 그렇게도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좋았으며, 하기에 '안보를 정권 유지에 악용하는 못된 버릇에 빠져 있는 일부 이기적인 군인들이 병영을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권력기반으로 생각하고 병영을 철저하게 타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여 굳이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고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병영생활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비역 병장 표현일이가 아직도 저 막사 안에서의 짓거리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직도 남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데에 화가 난다. 아직도 저 비굴을 청산하고 있지 못한 데에 가슴이 아프다.

그는 사족을 달아서 말한다.

이 작품이 등단을 위해서 쓰여졌던 탓이라서 내용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구체제의 폭압과 역사적 안목에 대한 통찰의 결여가 그것'이라고. '다시 쓰겠다'고.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문관 하민혁

'고문관' 하민혁의 쫄병시대


그는 지금 우리를 놀리고 있는 것인가? 저 혼자서 빠져 나가겠다는 말인가? 자신은 저 비굴한 쫄병의 늪에서도 홀로 고고한 연꽃 한 송이를 피우고 있었노라고, 가열찬 투쟁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이제 모든 쫄병을 배신하고 저 저널리즘의 힘에 아부를 하려 하는가.

그러나 쫄병을 버리고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도대체 학사 출신 쫄병의 전형인 저 표현일이를 그는 또 얼마나 더한 거짓말장이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작가와 표현일은 닮았다.

그리고 우리의 우려하는 바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표현일이는 철저한 쫄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젊었으며 그것은 그가 성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값비싼 하나의 통과의례라 여길 수도 있을 터이므로.

그러나 작가는 그렇지 않다. 예비역 병장 작가 김신은 이제 더 이상 쫄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당당해야 한다. 아직도 비굴함과 아부 근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저 쫄병의 멍에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는 이미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안타깝다.

이 소설을 상재하며 내뱉고 있는 그의 변명을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그의 가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등단을 위해' 이 작품이 쓰여졌기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 작가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당시에도 그러한 제약을 뛰어 넘으려는 작가들의 노력은 가열차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변명이라니? 이것은 제도권에 빌붙으려는 작가의 저열한 의식과 행태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가열차게 싸웠던 이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병영 안에서도 병영 밖 사회에서도 작가는 시대의 폭압과 싸우지 못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면 병영에서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다. 십분 양보해서 그때는 아직 사회 의식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고, 그 시기를 거침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다시말해 자신의 행태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그 시기의 전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작가는 이제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쫄병시대>를 그 부끄러운 시기의 한 참회록으로 상재해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쫄병시대>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아직도 그가 쫄병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걸로 보이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쓰겠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화가 난다.

우리는 병장 표현일이를 따라 무덤을 묻으며, 우리의 부끄러웠던 한 시기도 이제 묻어 버리고 싶어 한다. 헌데 그 시점에서 그는 돌연 다시 쓰겠다고 말한다. 쫄병들을 향해 '니네들은 형편없는 넘들이'라며, '시대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식충이들'이라 말하면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시대를 아파하고 있었다'면서 '다시 쓰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배신자이다.

이런 배신자 같으니!

표현일, 너는 마, 사실 쫄병을 거론할 자격도 없어. 그래도 우린 너같이 덥게 붙어먹지는 않았어 색햐. 소설 쓰지 맘 마!  같은 쫄병이었던 탓에 너의 소설 쓰고 앉았는 꼴을 눈감아주고 있던 우리가 바보다 색햐.

이 소설은 자신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솔직한 고백을 소설을 낳은 작가 자신이 부끄러워함으로써 그 고백이 지닌 진정성에 회의를 갖게 만들며, 그리하여 이 소설에 대한 우리의 신뢰성을 제로화시켜버린다. 그리하여 소설을, 기껏 재담으로 버티고 있는 말놀음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작가는 작가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통찰하여 흔들림없이 그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보다 더한 신고의 길일른지도 모른다.
 
번뜩이는 재담. 그것을 추구하여 순간적인 재미가 아닌 촌철살인의 무기로 만드는 것, 그것을 온전히 다듬는 길이 이 작가가 작가로 남는 길이 아닐까 싶다.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십 수년 전에 쓰여 피씨통신에 올린 글입니다. 당시 거의 한 달음에 쳐내려간 글이어서 날 것 그대로입니다. 혹여 김신님이 이 글을 보시더라도 이 점 널리 양해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