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빈치 코드'를 읽었다. 휴일 동안, 블로그 포스팅하는 짧은 시간을 제하고는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고 단숨에 읽어내려간, 흡인력이 대단한 소설이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마치 한편의 블럭버스터 영화의 시나리오를 본 기분이다. 세계적으로 2,500만부가 팔렸다는데, 소설을 읽고난 지금 드는 생각은, 무엇이건 대중의 기호를 사로잡는 데는 확실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소설이니만큼 상찬은 접고, 오랜만에 소설을 읽은 기념으로 떠오르는 생각 몇 가지만 적어본다.

작가인 댄 브라운의 탁월한 상상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싶다. 그만큼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 전체를 압도한다. 그러나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작위적인 면이 없지 않다. 생각하며 소설을 읽는 사람이었다면, 소설 읽기가 못내 껄끄러울 수도 있었을 부분이다.

예컨대, '요한이 여자였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나 '베드로가 요한(소설에서는 막달리아)의 목을 치려 한다'는 해석 부분, 그리고 '익명의 손'을 언급한 부분 등은 너무 억지스러워서 차라리 끼워넣지 않음만 못했다.

먼저, '나이프를 쥔 익명의 손'을 언급하면서 주인공은 미켈란제로가 인체에 정통한 화가였음을 강조한다. 즉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을 베드로의 손으로 보기에는 그림의 구조가 맞지 않으며, 따라서 그 자리에는 익명의 누군가가 있었고, 나이프를 쥔 손은 바로 그 '익명의 손'이라는 해석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위의 그림을 누르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익명의 손에 대한 추론은, 요한의 비정상적으로 긴 팔에 의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만다. 인체비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보다 더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베드로의 손이 아니라 요한의 손인 때문이다. 베드로의 나이프를 든 손은 요한의 기다란 팔에 비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구도하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림에 나오는 요한이 실은 요한이 아니고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였다거나, 베드로가 당수 자세로 막달라 마리아의 목을 치려 한다는 부분 등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다빈치 코드'를 읽으면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떠올렸다. '사람의 아들' 또한 기독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서다. 개인적으로는 문제 의식 자체가 '다빈치 코드'보다 더 나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의 사람의 아들은 장편으로 개작하기 전, 그러니까 처음 출간될 당시의 중편이었을 때를 말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의 아들은 장편으로의 개작과 더불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극적 구성과 재미를 잃어버렸다. 댄 브라운에 대해 이문열이 패착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문열은 아마도 톨스토이의 '부활' 같은 소설을 쓰고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톨스토이가 살던 이성의 시대, 브로조아 시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계몽의 시기가 아닌 것이다.


이문열이 패착하고 있는 지점은 '현학'에 있다. 소설가로서의 재능만을 발휘해야 할 부분에서 현학적이게 되는 것이 이문열의 단점이랄 수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할말이 많지만 다른 글을 통해 이미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사람의 아들은 추리적 기법과 소설적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문열은 여기에 뭔가를 더 담고 싶어했다. 모종의 컴플렉스가 그의 현학적 기질을 발동케 했고, 그것이 소설의 구성과 재미 둘 다 잃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같은 현상은 그의 '황제를 위하여' 등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문열이 가장 탐탁해 하지 않는 '추락하는 것이 날개가 있다'가 실은 소설적 형식과 재미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에 속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야기가 약간 겉돌았다. 이문열 소설의 이같은 '계몽주의적' 현학에 비한다면, 다빈치 코드는 얼마나 소설 작법에 충실한 것인가? 장광설로 현학을 뽐내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지적 만족과 함께 소설 읽는 재미를 듬뿍 안겨주고 있지 않은가? '다빈치 코드'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만든 가장 큰 동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빈치 코드' 아이콘과 '행인2'의 반란

소설 '다빈치 코드'는 프롤로그를 시작하기 전, 'FACT(사실)'라는 타이틀 아래 실재하는 몇몇 인명과 지명, 건물과 단체명을 적시한다. 그런 다음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술작품과 건물 , 자료,  비밀 종교의식 들에 대한 모든 묘사는 정확한 것이다"고.

어제인가, 작가인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는 픽션'임을 다시금 강조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 코드를 놓고 끊임없는 사실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 이면에 작가가 사소한 듯 끼워놓은 이같은 장치가 적지않은 역할을 한 결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을 떠나, 오늘날 다빈치 코드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데는 인터넷 혁명으로 비롯된 시민 의식의 성장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시민 위에 군림해오던 주류 문화의 허구와 억압에 대한 반작용, 즉 '행인2'로 대변되던 시민이 오직 주인공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주체적인 시민으로 거듭나려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봐야 하리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다빈치 코드'를 읽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최근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유다복음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행인2의 반란'이라는 관점에서 하고싶었고, 다빈치 코드는 이를 위한 목적으로 읽은 책이었다. 그러나, 이미 연휴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