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어느 일이 아니다)부터 처리할 것인가?

컴터 앞에 앉을 때마다 거듭하게 되는 고민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쳐내도 쳐내도 할 일은 늘 저만큼 밀려있다. 우선 성능이 떨어진 서버 교체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고, 준비 중인 서비스를 위한 사이트를 띄워야 하고, 민생고와 직결되는 고객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그런데, 대체 어쩌자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리장님이 트랙백해준 "블로거(그)에게 비판적 사고는 생명이다!" 는 글을 읽었다. 거기서 링크를 타고 다시 류한석님의  “부정적 사고주의자들이 끼치는 해악” 이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다.

"돈 되는 일만 합시다." 힘든 상황에서도 10여년을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는 이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저 말을 다시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류한석님의 주장은 옳다.
류한석님이 인용하고 있는 R.H. 슐러라는 이의 말을 재인용해보자.


부정적 사고주의자들은, 날카롭고 부정적인 눈을 가지고 입맛에 맞지 않는 점만을 찾으려고 하고, 제안된 아이디어들을 대충 훑어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일을 잘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하는 대신에 왜 그 일이 잘 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만을 찾아내려 한다.

그것이 왜 이루어질 수 없는가, 그것이 왜 나쁜 아이디어인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다가 어떻게 실패했는가 따위의 피상적이며 잘 생각해 보지도 않은 무책임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즉석에서 일시적인 감정으로 충동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 거리를 미리 상상해 내고, 실패를 예언하며, 고생을 예견하고, 장애물을 미리 눈앞에 그려 보며, 비용을 과장해서 추산해 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근심을 만들고 낙천주의를 말살하며 자신감을 질식시켜 버리는 사람들이다.



다시 봐도 옳은 얘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있다. 이같은 얘기를 함부로 일반화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류의 얘기는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는 유용할 수 있지만, 이를 일반화하여 타인에게 적용하고 타인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 경우, 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저 무수한 처세술 혹은 성공학의 한 아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류한석님의 주장은 옳지만, 그것은 기껏 처세술 내지는 성공학의 한 방편으로서의 의미에 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같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슐러라는 이를 인용하여 펼치는 류한석님의 주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인용 글로는 살짝 긴 듯 하지만, 류한석님의 주장을 한번 인용해보자.


이런 사람들은 어느 조직에나 있습니다. 팀을 만드시는 분, 그리고 협업을 해야 하는 분들은 바로 이런 부정적 사고주의자들을 절대로 피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편견, 열등감,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그 자신 스스로는 무엇을 해도 안 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아도 부정적입니다.

간혹 그러한 부정적 사고주의자가 샤프해 보이거나 똑똑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섹시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본질을 잘 보세요. 그가 과거에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가를 잘 보세요. 그의 의견이 그 스스로 부단히 생산적인 가운데 경험상 우러나오는 발전적 비판인지, 아니면 비생산적인 삶을 반복하면서 이 사회나 조직에 대한 (사실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배설하고 있는 지를.

전자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후자는 절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류한석님은 "부정적 사고주의자들을 절대로 피하셔야 한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절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그들이 "편견, 열등감,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그 자신 스스로는 무엇을 해도 안 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아도 부정적"이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올바른 조언인가? 성공학 혹은 처세술은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 종교적 억견(DOXA)과 흡사하다. 감정에 호소하고, 특히 불완전한 (인간)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외곬으로 파고 들어 감정적 반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같은 억견의 특징은 관점을 달리 하는 순간 그 결과가 180도 달라진다는 데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류한석님의 주장에 이를 대입해보면 이내 분명해진다.

류한석님은 부정적 사고자를 피해야 하는 이유로 그들이 "편견, 열등감,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그 자신 스스로는 무엇을 해도 안 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아도 부정적"인 때문이라 말한다. 나아가 "간혹 그러한 부정적 사고주의자가 샤프해 보이거나 똑똑해 보일 때가 있다"고 하면서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본질을 잘 보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류한석님께 하나 물을 수 있다.  
"류한석님의 저 주장은 부정적 사고의 산물인가, 아니면 긍정적 사고의 산물인 것인가" 하고.

류한석님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부정적 사고주의자'를 비난하는 류한석님 또한 결국은 부정적 사고주의자의 한 전형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이 어떻게 나오든지를 떠나서, 나는 류한석님의 주장에 동의한다. 동의는 공감과는 다르다. 나는 리장님의 주장에 100% 공감하지만, 그 동의는 절반을 넘지 않는다. 바로 류한석님의 주장에 대한 동의가 가져간 만큼의 동의다.

블로그코리아(이하 '블코')의 건승을 비는 어제 글에서 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그들의 의지와 노력에 경의를 표한 바 있다. 류한석님의 주장을 빌어 말하자면, 블코의 '긍정적 사고'를 높이 산 셈이다.

그렇다. 세상을 움직여가는 것은 결국 긍정적 사고인 것이지 부정적 사고인 것은 아니다. 부정적 사고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 사고를 멀리 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류한석님의 주장에 공감할 수 없는 건 이 지점이다), 부정적 사고는 필요하되, 그것은 긍정적 사고의 동인 혹은 기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고, 긍정적 행위를 전제한 사고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도 있다. 필요한 운동이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은 과연 성공했는가? 혹자는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성공에 부정적이다. 무엇을 위한 안티조선 운동인가를 먼저 생각했다면, 안티조선 운동이 지금처럼 이렇게 지지부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안티조선 운동은 '안티'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 지움에 실패했다. 안티조선 운동은 안티로 할 수 있는 일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안티로 할 수 없는 일, 즉 새로운 언론의 가치를 창출해내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일에는 실패했다. 지금도 여전히 '안티조선'을 부르대야 하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안티조선 운동은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그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권력 놀음에서 벗어나), 안티를 넘어서는 새로운 언론을, 바른 언론을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구체적인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운동은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내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에 기꺼이 후원금을 내는 까닭이다. 새사연의 손석춘은 내가 주로 비판한 언론인 가운데 하나다. 행동이 없이, 비전의 제시없이 주디로만 비판을 일삼고 정의를 부르댄다는, 그러다보니 결국은 계속 자기모순적인 발언을 일삼는다는 게 비판의 주된 이유였다.

그런 내가 새사연에 후원금을 내는 것은, 비록 모색 단계이긴 하지만, 새사연이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곳으로 비쳤기 때문이다(나는 생래적으로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에 부정적이다. 그것은 아무리 좋게 봐줘야 기껏 기생의식의 발로인 '앵벌이'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보는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을 움직여가는 건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실천을 동반한 말이다. 말로만 이룰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하물며, 그 말이 말도 안 되는 말인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내가 자주 진중권 류에 밥맛이어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얘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보자.

이 포스팅은 리장님의 "블로거(그)에게 비판적 사고는 생명이다!" 는 글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블로거컨퍼런스'와 관련한 논란의 연장선에서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글이다.

'한국블로거연합(이하 한블연)'이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을 때 많은 블로거가 이들의 행태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 중에는 이번에 '대한민국 블로거컨퍼런스(이하 블컨)'에 관계한 분들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 리장님은 어느 포스팅에서 도대체 한블연과 이번 블컨의 행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적절한 지적이다. 나 또한 다른 포스팅에서 유사한 언급을 한 바 있다. 이같은 지적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블로거가 누군가/뭔가의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는, 혹은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이며, "우리가 항상 누군가/뭔가의 들러리"로 역할해 왔다는 데 대한 우려인 것이라고.

그러나 같은 글에서 적고 있듯이, 그건 비단 "블로거 컨퍼런스만이 아니고, 늘 그래 왔던 일"이었고, 그래서 "이같은 얘기 나오게 되면 으레 '언제는 뭐 안 그랬나? 늘 그래 왔는 걸..' 하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한블연에 대한 비난이 봇물을 이룰 때, "누군가는 어느 순간 그 일을 도모할 것이고, 한블연은 단지 그 단초를 연 것일 뿐"이라며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곳이 무엇을 하는 어떤 곳이든 들러리는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들러리는 늘(혹은 대개는) 주인이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얘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블로거들이여~ 부정적 사고를 겁먹지 말고 자유롭게 맘껏 블로깅하시라~"는 리장님의 주장에 백번 공감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류한석님이 일독을 권하는 “성공하는 창업자의 조건”을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맘껏 블로깅할 수 있는" 환경은 그래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장만이 아닌 행동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들러리가 아닌 주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덧붙이는글>
1. 미완성 글의 타이틀이었던 '류한석님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를 현재의 타이틀로 바꿉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특정인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거는 게 그리 바람해뵈지 않아서입니다.
2. 글은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첫째는 요령있게 글을 쓰는 재주가 없어서고(저는 원래 손발을 움직여 먹고 사는 노가다 출신입니다),  둘째는 더 하고싶은 얘기가 남아서입니다.  못다 한 얘기는 다른 글을 통해 보충하고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