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몇몇 블로거가 조선일보의 사설을 문제 삼았다. 'MBC 귀족 노조 '대한민국은 독재국가'라고 세계에 외치다' 라는 사설인데, 비판의 요지는 저 사설이 너무 편향적이고,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로거가 링크해준 조선일보의 저 '유치하다'는 사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나는 조선일보가 왜 일등신문일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한번 절감했다.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인 이유

일등신문 조선일보

일등신문 조선일보



조선일보의 저 사설은 분명하다. 하고싶은 말을 우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전하고 있다. 무엇을 더 바랄까? 이건 유치한 게 아니다.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현학질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통한다.

이른바 진보매체라고 불리는 신문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현학질이다. 군더더기 없이 곧장 치고 들어가야 할 지점에서도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내보이려 먼저 안달이다. 그래서 기어이 한두마디를 더한 다음에야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를 내보이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부박한 수준이다. 조선일보 기자가 저들보다 배운 게 떨어지고 든 게 없어서 아는 체 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한겨레 계열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케이스가 <씨네21>이다. 얼마 전에 덜 떨어진 어떤 친구가 학창 시절에 그거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으면 의식있는 대학생 축에 끼지 못했다고 말한 바로 그 잡지다(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서 링크는 생략한다).

'지적 허영' - <씨네21>이 판 상품이다. 이 잡지는 온갖 현학질로 가득하다. 이들은 영화 하나에서 인류의 2500년 정신사를 녹이고, 공연 하나에 세상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담아 내놓는다. 이들에게는 포스트모던이 일상이고 라깡과 들뢰즈가 친구이자 간식꺼리다. 마치 누가 누가 잘 났나를 겨루는 듯 지적 허영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이들의 글은 온갖 기교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정도로 글을 갖고 놀아~' 하는 투다. 그러나 글에 정작 담겨 있어야 하는 독자에의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딱 학부 2학년 수준의 지적 허영만이 넘쳐날 뿐이다.

어딘가에서 보니 한겨레신문이 어렵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봉급이 반토막이 났다고 한다. 오마이뉴스는 오늘 내일 하고, 프레시안은 이미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넜다고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어렵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바로 위에 나열한 저 신문들을 보고 있자면 때로 숨이 막히곤 한다. 특히 사설이나 칼럼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초등학생에게 지면을 맡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온다.

왜 이럴까 싶어서다. 논리는 없고 주장만이 넘쳐나는 때문이다. 주장만 넘쳐난다면 모를까 듣보기에 역겨운 자기자랑까지가 있는 지경이면 두 번 보기가 역겨워진다. 정신 제대로 박힌 이 가운데 누가 이런 신문을 제돈 주고 사서 보랴 싶다.

이런 얘기 하면 으레 하는 말이 돈 타령이고 경품 타령이다. 돈이 없어 부자 신문들처럼 경품을 뿌리지 못하는 때문이라는 변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을 짚고 있는 말은 아니다.

본질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봐도 부족한 그 본질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못난이들이 항용 그렇듯이 이들 역시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부리면서도 그것이 맞다고 우기는 양이 딱 저 못난이들의 모습이다. 

세상에 천지 삐까리로 널린 게 잘 난 사람들이다. 당장 조선일보만 봐도 그렇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인가? 이 말 하면 또 헷소리 삘삘 해대는 사람들 있겠지만, 어떤 걸로 비교해봐도 그들은 잘난 사람들인 거 맞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 다음이다. 한번 잘 생각해보라. 그런 잘 난 조선일보가 사설이나 칼럼, 기사들에서 자기 잘 난 척을 하고 있던가?

뭐라고 답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른바 진보 매체들에서 하듯이 그렇게 밥 먹듯이, 밥맛으로 잘난 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독자의 수준에 눈높이를 낮추는 모습이다. 허두에 놓인 저 사설만 해도 그렇다. 어깨에 힘 빼고 확실하게 독자의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군더더기 하나 없이 확실하게 전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설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사설은 자기 주장을 펼치라고 있는 지면이다. 유치하거나 말거나를 따지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이건 유치한 게 아니다. 여기서 유치함은 목표를 위해 차용한 하나의 수단인 때문이다.

진보매체들은 정확히 이 반대다. 목표와 수단이 도치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죽었다 깨나도 유치할 수 없다. 고결해야 한다. 여기서는 자신의 고결함이 목표가 되고 정작 목표여야 할 독자에의 설득은 다만 자신을 드높이는 한갓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유치해도 되는 데서는 한사코 고결함을 챙기는 대신, 유치하지 않아야 하는 지점에서는 한없이 유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만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같은 웃기잡는 짓을 하는 데는 독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이들 독자들은 자기들만 만족시켜주기를 원한다.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이 저 신문과 자기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못 견뎌 한다. 이들에게는 다름은 곧 악인 때문이다(저 신문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저 신문으로서는 지금 이대로 충분히 족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독자가 아니고 이미 독자인 이들의 지지다. 왜냐면 그들이 없다면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새로운 독자에의 배려는 감히 꿈도 꾸지 못 할 일이다. 이른바 악순환의 연속인 셈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답이 안 나온다. 시쳇말로 사람이 못 났으면 솔직하기라도 해야 한다. 지금 이른바 진보 매체에 필요한 것은 이 솔직함이다.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다. 수준이 바닥인 게 뻔히 보이는 마당에 나 잘 났다고 백 날 떠들어봐야 속 보이는 짓일 뿐이다. 딱 그 수준에 있는 어리석은 몇몇 중생들 빼고 나면 그런 흰소리에 넘어갈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잘 났다고 헷소리 늘어놓을 지면과 시간 있다면, 그 시간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붙들고 그 앞에 몸을 굽히고 함께 가자 해야 하고, 그 지면에서 독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줍잖게 누굴 가르치려 들지 말고 배우려 해야 한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세살 먹은 아이한테서도 배울 건 있는 법이다.

조선일보를 이기고싶은가? 그렇다면 일등신문 조선일보한테서 배울 일이다. 일등, 그거 돈만으로 되는 거 아니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내어 일등 잘못하는 것 찾아 헤매지 말고(남의 잘못 지적하는 것쯤은 2살만 먹어도 할 줄 아는 일이다), 배워야 할 게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걸 챙겨야 한다. 잘못한 거 찾는다고 해서 내한테 보탬 될 거 하나도 없다. 비판하다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히려 그 짝만 날 뿐이다.  

틀린 걸 맞았다고 우기지 말고, 다른 걸 악으로 치부하지 말고, 틀린 건 틀렸다고 하고 다른 건 다른 걸로 봐야 한다. 잠시 잠깐은 그게 힘들다 여겨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게 이기는 길이다.